[하도겸의 차 한 잔] 인생의 실체를 알려주다…김두진 작가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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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12-2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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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니스트(문학박사)

김두진 작가의 '대지' [사진=하도겸 박사 제공]


미키마우스를 안다. 도널드덕도 좋아했던 것 같다. '만화캐릭터 속 주인공들은 정말 행복할까?'라는 불편한 의심은 동심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미키마우스와 도널드 덕이 우리에게 정말 즐거움과 행복을 준 걸까? 박제화된 어른과 아이라는 상하구조 속에서 작은 저항이 있었을지라도 결국 이 세상에 순응하는 또 하나의 안드로이드를 확대재생산하는 기제가 아니었을까? '디즈니는 혹시 CIA의 또 다른 공작소는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다. 만화 캐릭터 속에 내재된 '실재'의 모습은 정말 어떠했는지 그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의혹의 '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만화 주인공들 속에 함축되고 어쩌면 기호화된 최면은 실제로 매우 효과적이었다. 많은 어린이들은 심지어 몸체만 커진 우리 어른들조차도 미키마우스를 끔찍한 '쥐'가 아닌 만나보고 싶은 '인물'로 손꼽을 수도 있다.

인성화된 미키마우스라는 이미지의 배후에는 정말 어떤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을까? 곡식을 훔치고 전염병을 퍼뜨리는 쥐로부터 펫, 아니 앙증맞은 우리 친구로까지 다가온 미키마우스에 대한 우리들의 무의식은 신화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최면의 결과들일 따름이다. 디즈니 영화가 사라진 어느 세대의 인류들은 파편으로 남은 미키마우스를 고고학적 층위에서 발견하고 매우 끔찍해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콘텍스트 없이 남겨진 '쥐'는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닐 수 있다. 우리에게 디즈니는 최면술사일 따름이며 우리는 그런 '마법'아니 어쩌면 흑마술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이런 주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퇴마사에게도 쉬운 작업은 아니다. 일단 미키마우스라는 브랜드에 주입된 인성화된 귀염성을 걷어내고 '쥐'라는 실체를 모두에게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이런 주술의 배후를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집단적인 최면에서 벗어나는 몸부림을 쳐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탈을 쓰고 사실은 금권만능주의라는 실체를 숨기고 있는 우리 현실 속에서 국민들은 실업 등으로 고뇌할 틈도 없이 '개·돼지'로 치부되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촛불을 켜도 우리는 미키마우스의 그림자를 볼 뿐 그 몸 속에 숨겨진 주술을 파헤치기에는 매우 벅찰 것 같다. 가증스러운 사기꾼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티베트의 고승은 해골관을 시작한다. 인생무상을 한없이 외우면서 출가와 함께 세속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도 초월하기는 바란다. 하지만 부처를 이룬 이는 아직 한 명밖에 없는 듯하니, 그게 그리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닌 듯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정말 일희일비하지 않고 마라톤 같은 인생의 기나긴 여정을 우린 밟는다.

사기꾼의 성별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남자든 여자든 사기꾼은 사기꾼일 따름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로 남자든 여성든 가증스러운 얼굴의 살을 벗기면 드러나는 뼈는 인류모두가 같은 화학적 구성요소를 갖추고 있을 듯하다. 비롯 남녀의 해골이 좀 다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레즈나 게이 등의 성적 소수자의 해골은 어떠할까? 무식과 편견의 오해라는 질곡 속에서도 그러한 의심조차 마초적인 이데올로기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적어도 성기나 성징들이 제거된 해골의 모습은 미키마우스를 단박에 '쥐'로 만들 수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미키마우스를 굳이 칼을 대고 해부할 필요도 없이 '해골'관을 통한 실체의 인식은 각종 오염과 왜곡으로 포장된 '최면'이라는 굴레를 단박에 벗게 해준다. 이건 그냥 사유의 측면에서 아니 머리만 써서 실체를 파헤쳐보려는 게으름의 소산일 따름이다. 하지만 응용이나 활용은 좀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해골만을 가지고서 남녀를 재생하고 사기꾼의 모습을 볼 수는 없을까? 이런 소박한, 아니 너무나도 욕심 넘치는 시도는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현실화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가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발견될 인골은 '고대인'의 모습으로 재현되어 우리와의 접촉을 시도하기도 한다.
 

김두진, '비너스의 탄생' [사진=하도겸 박사 제공]


이런 철학적 사유와 역사유를 하는 과정에서 김두진 작가(43)를 만났다. 김두진은 2000년대 초부터 디즈니 만화나 오즈의 마법사 등에 나오는 이미지들을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해 왔다. 최근에는 3D 모델링 프로그램 ‘라이트웨이브’를 통해 고전 명작들에서 배경과 옷 그리고 살 등의 외피를 벗겨내고 빈 공간에 앙상한 해골만 남아 있다. 그러한 작업 자체가 패러디로 해학적으로 볼 수 있으나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는 그 과정자체가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추구하는 '옷이나 살갗만 벗으면 모두 다 같은' 헌법에서나 볼 수 있는 평등성을 지향한다. 나아가 차별에서 벗어나 인간 개개인의 정신성에 다가갈 수 있을 듯하다.

김두진의 예술작업을 '커밍아웃'에 주안점을 두고 '성적'으로 해석하는 모든 논평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성(性)의 이분화는 사람의 눈으로 만든 차별에 불과하며, '사이의 성'을 넘어 감히 우리가 만든 신의 안목으로의 초월을 담론화하는 것은 어떨까? 해골이 상징하듯 그가 비록 남근이나 성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극복을 외쳤다고 해도 그의 작품에는 그런 의미를 초월하는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이 시대를 암흑으로 뒤덥고 있는 '흑마술'이라는 주박에 대한 퇴치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징성은 내년 2월 1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전시되는 김 작가의 '대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선시대 인물화가 채용신의 '십장생도'(1920년대)를 새롭게 해석한 신작 대지에서 대형 인물 초상은 살점이 모두 제거된 빛나는 사슴 뼈들로 꽉 차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수나 영생을 상징하는 사슴을 통해 불노장생에 대한 우리 인간의 끝없는 어쩌면 추악한 집착과 고통의 끊임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상징성에 굳이 '성'을 들이내미는 것은 그의 예술성에 대한 '마케팅'의 무모한 도전으로 보이기도 하다. 해골이 사람이 아닌 동물로 변환된다는 점은 그의 평등성과 상징성의 확대를 의미한다. 인간은 모두가 같은 사람이면서 더 큰 범주에서 동물이기도 하다. 좀 위험하기는 하지만 사고의 확장의 한 구석에는 죽음이라는 누구, 아니 그 무엇도 피할 수 없는 전제가 있기도 하다. 모두 다 언젠가 죽기에 우린 모두 평등한 걸까?

주말 광화문으로만 가지 말고 가끔 시대적인 모순을 온몸으로 저항하고 초월하고자 몸부림치는 김 작가를 비롯한 우리 '작가'들을 만나러 가족이나 벗들과 과천으로도 한번 가보라!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이 광대한 전시 속에서 보고 싶은 오브제를 찾아 미로를 헤매는 것은 '순시리'로 인해 상처입은 심신을 치유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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