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13]망부와 함께 여생 보낸 남호진 여사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6-09-07 14:04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13)

  • 제6장 재계활동 - (108) 뒷 이야기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의 84년에 걸친 생애 후반기 30년 동안 남호진(南浩珍) 부인이 차지한 위치는 실로 막중했다. 목당에게 있어서 제2의 인생을 열어준 다정한 반려자였으며 조언자였던 것이다.

목당의 장례식전(葬禮式典)에서 졸도한 호진 미망인이었으며, 그는 목당을 생전에 위하듯이 그 묘소를 가꾸는 데 온갖 정성을 쏟았다.

봄이면 치산(治山, 산소를 매만져서 다듬음)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나무를 가꾸는 데 정성을 쏟았다. 이와 같이 여생을 목당의 묘소에 바치고 망부(亡夫)와 말없는 대화 속에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목당이 돌아간 후 정부는 목당에게 ‘무궁화장(無窮花章) 훈장’을 추서하였는데, 김상협(金相浹) 국무총리가 직접 신당동의 미망인을 찾아와 수여했다.

목당의 3주기(週忌)를 앞두고 한국무역협회는 고 이활 전기편찬위원회(傳記編纂委員會)를 조직, 전기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군자도(君子道)로 일관한 담담한 처세로 84년의 생애를 그는 마쳤다. 일찍이 외유(外遊)길에 올라 조국(祖國) 광복(光復) 후의 경세도(經世道)가 무역입국(貿易立國)에 있다고 간파하고 그 외길을 걸어 나라의 중흥을 도모하는 데 이바지 했다.

한편 육영사업(育英事業)에 뜻을 두어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가 창업한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설립을 지원하고 인촌이 간 후 그의 뒤를 이어 재단 운영에 힘을 기울여 학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재걔(財界)의 거성(巨星) 목당 이활은 화려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영합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그의 덕행(德行)의 소치였다.

덕불고(德不孤, 덕이 있는 사람은 덕으로 다른 사람을 감화(感化)시켜 따르게 하므로 결코 외롭지 않음)의 진리를 몸으로 밝혀준 것이 목당 이활이었다. 그는 유교시대(儒敎時代)를 장식해 준 마지막 군자(君子)였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