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11]1982년 10월 6일 오후 3시 56분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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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9-0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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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11)

  • 제6장 재계활동 - (106) 유언없는 임종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1975년 초봄인 3월말 해사(解士)가 되자 용인(보현리) 명동성당 공원묘지에 자리를 잡은 자신의 묘자리를 가꾸기 시작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도 밝았던 목당이어서 그는 그의 유택(幽宅, 묘지)를 가꾸는 데 꼭 반년이 걸렸다.

그리고 자신이 운명한 후 집안사람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자신의 시신(屍身)을 넣을 관(棺)의 크기를 적은 쪽지를 두 벌 만들어, 한 통은 산학재단(産學財團) 사무실 개인용 캐비닛에, 그리고 또 한 통은 집의 문갑에 넣어 두었다. 그는 이미 1972년 대장암(大腸癌) 수술을 받으면서 죽음을 생각했던 것이며, 남은 수명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1982년 타계할 때까지 10년이란 세월을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며 인생을 마무리 짓는 생을 그는 살았던 것이다.

대장암 수술 이후에는 창자를 옆구리로 빼내어 배설물을 뽑게 되어 있는 데도 그는 남의 손을 빌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취약점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는 1981년 6월 12일, 다시 통증이 와서 고대병원(高大病院)에서 두 번째 암 제거(癌 除去) 수술을 받아야 했다. 두 번째 수술로 본인도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한 것은 물론이다. 그는 다시 기동을 하게 되자 손자와 조카들에게 남길 유묵(遺墨)을 시필(試筆)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에 사용해온 도서(圖署)를 화선지에 옮겨 찍어 인보(印譜, 인발을 모아둔 책)를 만들어 인장함(印章函)에 간직했다. 그가 애지중지하던 벼루와 연적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소중히 건사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다음해인 1982년 9월 30일, 목당은 산학재단에 들렀다가 고대 재단(高大 財團)에도 들렀다.. 2층 사무실을 운전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올라갔는데 내려올 땐 한 사람의 부축으로 어려워 사무국 직원 한 사람이 따라붙었다. 갑자기 기운이 떨어진다고 그는 그때 말했다.

이것이 목당의 마지막 출근이었다. 다음날부터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으나 3일 저녁 6시 갑자기 통증이 심해져 고대병원에 응급 입원을 했다. 입원한 지 세 시간쯤 지나 목당은 가슴이 답답하다며 가슴을 쳤다. 이내 산소호흡이 시작되었다. 이날 김득권(金得權) 신부 집행으로 종전성사(終傳聖事)가 이루어졌다. 병원측은 손쓸 여지가 없음을 아들 병린(秉麟)과 남(南)씨 부인에게 통고하고 집으로 모셔서 임종(臨終)을 하도록 지시했다. 4일 아침을 기다려 퇴원하는데 본인은 무엇 때문에 퇴원을 한단 말이냐고 했다. 집에 돌아온 이후 목당은 가끔 혼수상태에 빠져들곤 했다. 임종기도(臨終祈禱)가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6일을 맞았다.

6일 하오 2시, 의사로부터 임종을 지킬 분들을 연락하라는 지시가 있어 일가 대소 친척들이 모여들고 외부인사로는 김상만(金相万)과 나익진(羅翼鎭) 부부가 달려왔다.

운명(運命)은 하오 3시 56분이었다. 조용한 영면(永眠)이었다. 재계(財界)의 거성(巨星) 목당 이활은 유언(遺言)도 없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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