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09]산학협동재단 이사장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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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9-06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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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09)

  • 제6장 재계활동 - (104) 두 개의 재단 이사장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조용한 생활을 갖게 되었다.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高麗中央學院) 이사장직이 있을 뿐이어서 일이 있으면 나가 이사회(理事會)를 이끄는 게 유일한 공무(公務)였다.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와 장지연(張志淵)의 ‘대동시선(大東詩選)’, ‘시경(詩經)’, ‘논어(論語)’ 등은 그가 가장 즐겨 뒤적이는 책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피곤하면 아내와 같이 인사동의 고화점(古畵店)에 들러도 보고 골동상(骨董商)을 기웃거려도 보는 그런 나날이었다.

목당이 무역협회 회장직을 물러나자 나라에서는 그의 그동안의 공로를 치하하고자 금탑산업훈장(金塔産業勳章)을 포상하였다. 고마운 일이었다. 목당은 앞서 1968년 5월, 고려대학교가 수여하는 명예경제학박사(名譽經濟學博士) 학위를 받은 일이 있고, 연세대(延世大)로부터는 명예법학박사(名譽法學博士) 학위를 또한 받은 바 있다.

목당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했다는 심경(心境)으로 만년(晩年)을 장식하는 일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1974년 3월, 무역협회가 산학협동재단(産學協同財團)을 설립하면서 그를 이사장(理事長)으로 선임하였음을 알려오지 않았던가. 사양했지만 끝까지 버틸 것도 아니었다. 회원 상사들이 지난날의 정의(情誼)를 잊지 않고 자리를 만들어 준 고마움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역협회는 신축 새 회관의 현판식에도 목당을 초대하여 박충훈(朴忠勳) 회장과 같이 현판(懸板)을 하게 하였는데, 목당은 협회의 그런 배려를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하는 터였다. 회원 상사들은 물러나는 그에게 새 회관의 낙성을 퇴직(退職)의 기념탑(記念塔)으로 안겨 주었던 것이고, 그로서는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터인데 또 이런 배려를 베풀고 있다니.

4월 17일, 무역협회 7층 회의실에서 장학생 대표와 문교부 및 무역업계(貿易業界) 대표들을 초청하고 장학증서(獎學證書) 수여식을 가졌는데, 이해에 선발된 장학생은 2142명이었다. 그리고 7월에는 학술연구비(學術硏究費)로 281명의 대학교수가 참가하는 158건의 연구과제(硏究課題)가 선정되어 연구비를 지급하였다.

원래 산학협동재단은 30억 원을 기금으로 출발했는데 무역협회의 추가출연(追加出捐)을 받아 12월 24일에는 기금 총액 50억 원을 자랑하는 재단이 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해마다 1000여 명에서 2000여 명에 이르는 장학생들에게 장학금이 베풀어지고, 학술연구비와 산학협동상(産學協同賞)이 대학교 또는 대학 교수에게 지급되었다.

노경(老境)의 목당에게 고려대학교 재단과 무역협회 산학재단 운영사업이 주어진 셈이었다.

1983년까지 이 두 재단의 이사장으로 있다가 재직한 채 그는 세상을 떴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한국의 무역 발전(貿易 發展)과 육영 사업(育英 事業)에 일생을 바쳐온 목당에게 주어진 상징적인 특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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