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서예로 써 내려가는 우정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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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8-3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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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예신[사진=예신 본인 제공]


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 예신(葉欣), 자는 향영(向榮), 1967년 랴오닝(遼寧)성 선양(沈陽)시 출신의 서예가이다. 5살 때부터 외조부를 따라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예신의 글씨는 장중하면서도 대범하고, 우아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1995년 국비 장학생으로 북한(조선, 편집자 주)에서 수학하며 한반도와 인연을 맺은 뒤 서예를 매개로 한 민간 외교사절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서예와의 인연

예신 선생의 첫인상은 점잖은 태도와 낮고 느린 말투 때문인지 전형적인 남쪽 지역의 ‘선비’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화제가 서예로 옮겨가자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예신 선생은 서예에 대한 견해와 깨달음을 솔직하고 간결한 말투로 풀어나갔다.

그의 외조부는 선양의 4대 원로 서예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훠안룽(霍安榮)이다. 1962년 랴오닝성을 대표해 중국 서예 일본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전시회가 끝난 뒤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궁 진열품으로 선정되었고, 생전에는 청나라 초대 황제인 누르하치의 능인 복릉(福陵)과 2대 황제 황태극(皇太極)의 능인 소릉(昭陵) 에 편액을 쓰기도 했다.
 

예신이 글씨를 쓰고 있다.[사진=예신 본인 제공]


집안의 장손인 예신 선생은 어릴 때부터 외조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맞벌이 부모님은 낮에 그를 외조부의 집에 맡기시곤 했다. 큰 정원이 있던 외가에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씨를 쓰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가는 자연히 서예 애호가들의 ‘살롱’ 역할을 했다. 예신은 외가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때때로 외조부의 글씨 쓰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조용히 지켜보았고, 서예는 이처럼 그의 인생에 자연스럽게 배어들기 시작했다.

외조부가 매일 새벽 기상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책을 보며 먹을 가는 일이었다. 예신은 밖에서 놀기 좋아하는 여타 아이들과는 달리 집에서 외조부가 글씨 쓰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을 더 즐겼다. 그는 늘 외조부 옆에 담요를 깔고 앉아 종이를 누르고 잡일을 돕곤 했다. “외할아버지가 글씨 쓰시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떤 감각 같은 것이 생겼어요. 글씨를 쓰실 때의 동작, 붓을 들고 써 내려가는 모습이 모두 머릿속에 그대로 와서 박혔죠.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때 그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사람들은 예신이 서예가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외조부를 따라 자연스레 서예를 익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외할아버지께서 저에게 매일 서예를 가르쳐 주신 시간은 30분밖에 안 돼요. 어쩔 땐 30분도 안 됐죠. 저는 매일 보는 일이었기 때문에 붓을 잡는 법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붓 잡는 법조차 가르쳐 주신 적이 없어요. 그냥 가로, 세로, 삐침, 파임을 어떻게 쓰는지만 알려주시는 정도였죠.” 어느 날 외조부는 구양순(歐陽詢)의 구성궁(九成宮) 서첩을 사와 예신에게 따라 쓰도록 했다. 최초의 정식 서예 훈련인 셈이었다.

예신은 자신이 서예를 익혔던 과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서예도 언어 공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꾸준히 자극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의 수많은 전통 예술가들이 대부분 그러하죠. 예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예술에는 재능도 필요하죠. 사실 어떤 분야에서든 일정한 성과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 오랫동안 연습하고 경험을 쌓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라톤처럼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일이에요.”

생각한 만큼 나아갈 수 있다

예신은 자신이 ‘한국어’와 인연을 맺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부모님은 학교에서 모범생이었던 그에게 항상 열심히 공부해서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가라고 하셨다. 학교의 학생주임 역시 예신의 성장을 눈여겨봤다. 학생주임은 늘 그에게 모든 과목을 잘할 필요는 없고 남들에게 뒤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서예는 남이 가지지 못한 예신만의 특기이고, 모든 사람이 칭화(淸華)대나 베이징(北京)대 등 명문대에 갈 수는 없다며 자신의 단점을 갖고 남과 경쟁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지원서에 ‘북한 국비 장학생’을 1지망으로 써냈다.

1985년, 예신은 북한에 국비 장학생으로 파견되었다. 서예에 예민한 감각을 지녔던 그는 북한에서 한국어 서예를 발견했을 때 ‘새로운 창’이 열린 듯한 느낌이었다. “한국어로도 서예를 쓸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 같은 외국인이 한국 서예를 중국에 소개한다면 저처럼 많은 중국 사람들이 호기심과 흥미를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북한 서예사 책을 얻기 위해 중국에서 가져 온 유일한 책인 서예 대자전과 서첩 몇 개를 갖고 북한 소년궁으로 향했다. 담당자를 만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자료를 한국어 서첩 한 권과 교환하고 싶다고 했지만, 서첩이 없으니 도서관으로 가 보라는 담당자의 말을 듣고 낙심했다. 그는 자료를 들고 도서관으로 갔지만 또 다시 완곡히 거절당했다. 졸업 즈음이 되어서야 거리에서 책을 파는 사람으로부터 겨우 서첩을 한 권 얻을 수 있었다.

북한으로 가기 전부터 그는 이미 북한에서 상당한 유명 인사였다. 입학 전 주북한 중국대사관은 그가 서예에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소식은 대사관과 학교에 빠르게 퍼졌다. 입학 후 그는 중국유학생회 선전위원을 맡았다. 당시 북한에는 각 대학기관마다 서예를 즐기는 중국인들이 조금씩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남는 시간을 활용해 이러한 곳에 가서 순회 강좌를 펼쳤고, 영향력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선전위원으로서 자신이 중국과 북한의 문화교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중국인들은 한국어 서예를 무척 신기하게 느꼈습니다.그래서 양국에서 각각 중-한 합동 서화전시회를 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이런 생각에 대사관을 찾아갔지만 당시에는 국가 간 교류가 지금 같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예신의 작품들[사진=예신 본인 제공]


국가 간 교류가 무산되자 일단 중국에서부터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 예신은 중국유학생협회의 이름으로 서예를 하거나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중국-북한 우호서화 합동 전시회’ 행사를 개최했다. 제1회 전시회의 개막식은 그가 지내는 유학생 숙소에서 열렸다. 전시회에는 15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됐고 각 대학 총장들도 초청했다. 개막식을 치른 후에는 전시작품들을 들고 북한의 주요 대학 8곳에 가서 다시 한번 순회전을 열었다. 당시 그는 겨우 스무 살에 불과한 대학생이었지만 기획에서 실행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꼼꼼히 챙겼다. 앞으로 서예교류가 평생 그와 함께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때였다.

그는 1985년 중국의 리펑(李鵬)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열사들에게 바치는 만련(挽聯·망자에게 바치는 애도의 글)도 썼다. 1986년 1월 15일자 <투샹스빠오(圖像時報)에는 “리펑 부총리가 ‘선양(沈阳)에서 온 젊은 서예가’라고 소개한 인물”이라는 기사도 게재됐다. 북한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한국전쟁 영웅에 대한 소개글 역시 그가 직접 썼다.

문화 교류에 ‘마침표’는 없다

그는 1996년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에서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과 서예 관련 자료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풍부했다.“저는 중국과 한국 서예계에 모두 알려진 서예가가 되고 싶습니다. 중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중국의 서예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요. 또 최근 중국 서예계에서 일어난 변화도 직접 목격했습니다. 한국 서예가들도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편으로는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서예는 굉장히 생소합니다. 앞으로 이런 공통점과 차이점을 더 많은 중국인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예신은 이러한 뜻을 품고 한국에서 서예 교류 활동을 시작했다.

인터넷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주로 책이나 잡지, 신문에 의존해 양국에 서예를 소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양국의 서예잡지에 서예와 관련된 글을 기고하고 서예 애호가들과 서예가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쓰면서 조금씩 영향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한국의 서예가들을 섭외해 중국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방식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한국 서예를 조금씩 알리고 이들이 한국 서예를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북한에서 개최했던 양국 서예가들의 교류전을 한국에서도 개최하고 싶었다. 작품 공모를 위해 자비를 털어 잡지에 광고를 냈다. 중국에서의 경험에 비춰 많은 사람들이 지원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지원은 커녕 문의 전화조차 없었다. 당황한 그는 현지의 서예 선생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서예 선생님은 광고란 하나의 형식일 뿐이며, 이러한 행사에 학생들이 참여하려면 선생들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그제야 이유를 깨달았다. “문화교류는 중국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죠. 그 뒤로 서예 선생님들을 찾아가 작품을 모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행사도 제 개인 명의가 아니라 협회 명의로 개최해야 했죠.‘한국세계예술발전센터’는 바로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협회 회장은 한국의 서예 선생님이 맡고 자신은 부회장 겸 사무총장을 맡았다.

작품 공모가 완료된 뒤 예신은 전시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회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중국 젊은이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첫 행사를 무조건 잘 치러내야 했던 그는 첫 전시회를 자신에게 익숙한 고향인 선양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인 회장에게 자신의 ‘무서움’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해 겨울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자비로 회장님에게 비행기표를 사서 보냈고, 공항 영접을 나갔죠.” 공항에서 예신을 만난 회장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도 걱정과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저를 마중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예신은 선양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유명 서예가들을 전시회에 초청했다. 회장은 이 같은 그의 ‘역량’에 놀라워했다.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회장은 기뻐하며 내년에는 참여 대상을 성인으로 확대하고 계속해서 행사를 개최해 가자고 말했다. 이듬해 한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할 때 작품 공모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수교 초기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출국 수속이 무척 번거롭고 복잡했다. 예신은 자신의 해외 출국 경험을 살려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하나씩 직접 해결해 나갔다.

제3회 전시회 때는 싱가포르의 서예가들도 초청했다. 행사의 명성이 점점 알려지면서 제4회 때는 한국에서 중국 각 성의 서예가협회 회장과 사무총장 등의 작품도 특별초청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며 점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전시회가 열 곳이 넘는 국가에서 개최된다. 한국세계예술발전센터의 회장은 이 전시회 덕에 한국 문화부에서 수여하는 문화 훈장까지 받았다.
 

예신은 서예의 정수를 늘 쉽게 풀어낸다. 시연을 하면서 서예 감상법을 강의하는 예신[사진=예신 본인 제공]


예술, 그리고 인생

서예를 실천하고 가르치고, 서예로 교류를 촉진하기까지, 예신에게 서예는 이미 그의 삶이자 일이 되었다. 현재 그는 서울에 있는 중국문화원에서 서예 강사로 일하고 있다. 여느 평범한 서예가들과 달리 그는 서예가 ‘거창한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수강생들에게 늘 집안 한구석에서 작은 책상을 펴놓고 붓, 먹, 종이, 벼루를 꺼내어 글씨를 쓰고 싶을 때 언제든 쓰면 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오랫동안 글씨를 써 온 그는 서예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기준과 판단이 있다. 예신은 좋은 글씨란 ‘만 살 먹은 고목덩굴과 같고, 천 리가 이어진 구름과 같으며, 드넓은 하늘의 밝은 달’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밋밋한 평판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나쁜 글씨라고 여긴다.

겉으로는 서예 문인으로서의 선비 같은 기품이 흐르지만 동북 지역에서 나고 자란 그는 말을 할 때면 동북 사람 특유의 솔직함과 시원함이 드러난다. 그는 벗과 교제할 때 ‘글씨는 곧 그 사람과 같다(字如其人)’라는 말을 많이 쓰고 소심하게 글씨를 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서예는 줄곧 대범하면서도 거칠지 않고, 정교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경지를 추구한다.

서예는 이미 그의 삶 속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그에게 서예란 영원히 불변하는 글씨가 아니다. 그는 글씨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개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한다. 이를 위해 매번 먼저 구조를 생각하고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때로는 한 글자를 제대로 쓰기 위해 최대 1년까지 ‘삐친 듯이’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서예와 인연을 맺은 그는 서예를 통해 국제 교류에 기여하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뤘다. 이제 30년을 걸어왔다. 지금도 그는 계속 이 길을 걸어가겠다고 말한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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