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차이더취안(蔡德全)의 대장간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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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2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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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로 만든 화병과 사계절 바리때[사진=차이더취안 제공]


인민화보 리후이펑(李慧鵬) 기자 =차이더취안(예명은 차이샤오샤오(蔡小小)), 자유예술가로 1968년 윈난(雲南)성 린창시(臨滄)시에서 태어나 1991년 윈난예술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베이징(北京)에 거주하며 20여 년간 회화 작품과 금속공예 작품 창작에 매진하고 있다. 2012년 말‘샤오샤오 대장간’을 열고‘대장간 예술 살리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차이더취안 사진[사진=인민화보 리후이펑 기자]


‘샤오샤오 대장간’은 베이징 퉁저우(通州) 쑹좡(宋莊)의 라마(喇嘛)마을 구석진 한편에 자리잡고 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대대로 내려온 대장간도 아니다. 게다가 일부러 홍보를 한 적도 없는데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예술품 소장을 위해 찾는 이도 있고, 대장간 풍경이 궁금해 찾는 이들도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전통 대장간이 기계생산으로 대체되며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제 막 문을 연 지 4년 남짓에 불과한 샤오샤오 대장간에 관심이 많다. 대장간 문화를 어떤 식으로 살려나가고 있는 지가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다.

그림장이에서 대장장이로

예술가 출신인 차이더취안은 자신조차도 대장장이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91년 윈난예술대학 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예술가의 꿈을 품고 윈난에서 2박 3일 쉬지않고 달려야 하는 베이징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베이징이라는 대도시에서 예술가의 꿈을 키우던 초기 그는 직장과 그림 그리는 작업을 병행했고 10여 년이 흐른 후 안정적인 생활에 안착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던 시절 그는 종종 대장장이의 도움이 필요한 금속공예 작품이나 부속품을 조각하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베이징 곳곳을 뒤져도 겨우 한두 곳의 대장간을 찾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운이 좋으면 다리 어귀나 동네를 떠도는 외지의 대장장이를 만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장장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호기심과 직업병이 발동하여 아예 직접 조사에 나섰다.
 

쇠로 만든 찻잔 세트[사진=차이더취안 제공]


그 결과 중국에서는 이제 대장간이 줄어드는 추세이고 기계화된 생산 방식이 전통적인 수공 생산을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전통적인 대장간은 효율성이나 이윤 창출 면에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와 부합하지 않아 일부 대장간만이 힘겹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중국에서 진정한 대장간은 10년 안에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란 우려감이 생겼다.
 

적동으로 만든 그릇[사진=차이더취안 제공]


차이더취안은 윈난의 린창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랐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그 시절, 사내아이들은 심심풀이로 대장간에서 쇠를 제련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하곤 했다. 운이 좋을 때는 직접 쇠를 두드려볼 기회도 주어졌다. 앞으로 대장간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을 몹시 애석해하던 그의 마음속에 직접 대장간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많은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고 그의 생각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대장간 예술 살리기 프로젝트’를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제련과의 진실한 만남

2012년 드디어 ‘샤오샤오 대장간’이 문을 열었다.‘샤오샤오 대장간’이라는 이름은 2005년 한 전시회에 참가했을 때 얻은 영감에서 비롯됐다. 당시 나이가 많지도, 명성도 높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성에 샤오(小)라는 글자를 붙여 샤오샤오라는 예명을 만들었다. 그는 지금도 친구들과 예술계 인사들에게 이 예명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작금의 대장간 현실을 고려할 때 기존 방법을 계속 고집해 나간다면 이미 쇠락의 길에 접어든 대장간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장간 살리기 프로젝트를 차근차근 진행하면서 예술이나 문화와의 접목만이 대장간을 활성화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양한 금속으로 만든 접시들[사진=인민화보 리후이펑 기자]


그는 직접 대장간을 열어 1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의 손바닥 사진을 찍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굳은 살이 생기는 변화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몸과 대장 공예의 만남을 기록했다.

이처럼 제련과의 진실된 만남과 회화와 조각에서 쌓아온 수년간의 경험을 더한 끝에 비로소 철을 제련하는 과정에서 찰나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자 흔적의 아름다움, 추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작품을 만들면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비결을 말하는 대목에 이르자 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대부분의 작품은 망치를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대개는 원래 생각했던 모습과는 점점 멀어지지만,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작품이 점점 더 완벽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완성품이 나오면 이것이 진정 내게 필요했던 것이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됩니다.”

그는 소장자들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작품을 감상하거나 직접 사용할 때 작품에 남겨진 작가의 흔적을 알아채고 그 정신과 노력에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그가 추구하는 ‘질박주의 예술’ 정신이기도 하다. 수공예술가는 반드시 직접 작품을 만들어야 하며 처음 생각했을 때와 완성했을 때의 변화를 포착하여 그 변화를 최종 작품에 녹여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아이디어와 초안만 제공하고 나머지 일은 공장에 맡기는 사람들은 예술가라고 칭할 수 없다. 그는 “돈을 버는 것이 주된 목적인 ‘자칭 예술가’들은 예술거리로 유명한 베이징 798예술구나 쑹좡(宋莊)예술구에서 활동하며 중국 예술계에 거품을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차이더취안은 집기를 절단한 흔적들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사진=인민화보 리후이펑 기자]


첫번째 작품은 ‘바리때’ 

그도 회화 작업을 할 당시 한때 베이징 798예술구에 몸담았던 적이 있다.“현재의 798에는 천박하고 지나치게 상업적 분위기가 만연해 있습니다. 쑹좡조차도 이런 추세를 따라가고 있죠.” 그는 2012년 쑹좡으로 옮겨 갔지만 다소 외진 곳인 라마 마을을 택했다. 그는 그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쑹좡의 1세대 예술가 대부분은 798을 떠나온 사람들이었어요. 당시 예술가들은 농민들과 한데 뒤섞여 지냈기 때문에 분간하기가 어려웠지만, 대체로 사람과 땅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습니다. 현재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때의 예술가들입니다.”

샤오샤오 대장간에서 가장 흔한 철제 제품은 바로 ‘바리때’다. 바리때란 스님들의 밥그릇을 말한다. 그가 막 베이징에 거처를 정했을 무렵 이곳이 라마 마을로 불리며 한때 불교성지였다는 말을 듣게됐다. 그는 먼저 바리때부터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길쭉한 형태의 은박접시[사진=인민화보 리후이펑 기자]


하지만 첫 작품의 탄생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바리때 형태를 갖추는 데 꼬박 보름이 걸렸다. 뚝딱뚝딱 망치를 두드릴 때면 자전거 바퀴를 때워 달라는 사람, 개집을 고쳐달라는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다. 이 역시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연습이자 생계 수단이라 생각하고 요청에 기꺼이 응했다. 물론 수입이 있어야 프로젝트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자조를 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첫 작품은 자신이 보기에도 약간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친구 한 명이 600위안(약 10만5000원)에 이를 사겠다고 나섰다. 대장장이로서의 첫 작품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사실은 친구를 도와주기 위한 마음에서였다.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는 친구들과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대장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샤오샤오 대장간에는 각양각색의 바리때가 가득차 있다. 철, 적동, 황동, 스테인리스 네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사계절 바리때와 24절기를 담은 바리때 등 종류가 다양하다. 작품 한 점은 몇천 위안에 팔리기도 한다. 몇년이 흘러 그는 샤오샤오 대장간을 비닐하우스로 덮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이 대장간이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고 떳떳하게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의 본보기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 결과를 제 손으로 만들어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질박주의 예술은 차이더취안 작품의 특징이다.[사진=인민화보 리후이펑 기자]


목표는 ‘질박주의’ 예술 구현

직접 망치로 두드려서 만든 작품들로 이뤄진 대장간 예술 살리기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그의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현재의 위치, 현재의 예술 형태가 평생의 사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대장간을 체험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가 채팅 프로그램인 웨이신(微信·위챗)을 통해 기획한 ‘대장간 체험 행사’에는 샤오샤오 대장간을 팔로우하던 많은 누리꾼들이 참여했다.

체험에 참여한 모든 네티즌은 작은 쇠붙이를 받아 원판을 만들어 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건장한 청년들조차도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힘들긴 했지만 꽤나 보람있는 일이었다. 작품을 직접 만들어 본 누리꾼들은 비로소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대장간이라는 오래된 공예를 예술의 형태로 부활시키는 것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라는 점이었다.
 

특이한 형태의 황동 바리때[사진=차이더취안 제공]


그는 철 제련 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통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가령 주변 지인에게 부탁해 제련 소리를 하나의 리듬으로 만들어 ‘대장장이의 노래’를 만드는 것이 있다.‘강남 스타일’이나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은 사과(小蘋果)’와 같이 리듬감 있는 노래를 만들어 수많은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겠다는 구상이다. 그는 중국 각지를 다니며 임시 대장간을 만들어 이러한 생각을 홍보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앞으로 많은 도전적인 계획이 있다. 진정으로 대장간 일을 사랑하고 대장간을 계속해서 이어가자는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아 계승자로 삼으려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그는 적임자를 찾기 전에는 제자를 받지 않고 대신 교육영상물 제작을 할 계획이다.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대장간 일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좋은 홍보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음력 설 때는 고향에 내려가 6600m²가량의 땅을 매입했다. 그는 고향에도 대장간을 만들 생각이다. 베이징과 고향, 이 두 곳의 대장간에서 자신과 뜻이 맞고 이 길에 뜻이 있는 실력있는 수공예 예술가들과 함께 ‘질박주의 예술’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꿈에 부풀어 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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