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 23주년 "서복의 뿌리를 찾는다"…기념식수 행사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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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5-1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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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 우정의 나무를 심고, 우리의 뜻을 담는다”

  • '서불과지'…서복공원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아주경제 진순현 기자=한중 수교 23주년, 한중 문화교류의 상징인 제주 서귀포시 ‘서복공원’에서 양국의 영원한 우정과 화합을 기원하는 기념식수 행사가 열렸다.

제주도(지사 원희룡)와 사단법인 한중친선협회(회장 이세기)·제주서복문화국제교류협회(이사장 김형수)는 지난 9일 서복공원에서 양국의 문화적 교류와 친선을 확대하기 위한 기념식수 행사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기념식수로는 ‘겸손’을 상징하는 ‘때죽나무’가 선정됐다.

이날 행사에는 원희룡 지사를 비롯해 이세기 한중협회장, 장씬 중국주제주총영사, 현을생 서귀포시장, 김형수 서복협회 이사장 등 각급 기관·단체장 및 협회 회원 1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자리를 빛냈다.
 

▲기념식수로 ‘겸손’이라는 꽃말을 지닌 ‘때죽나무’가 심어졌다.


원 지사는 인사말을 통해 “이번 기념식수 행사는 이세기 회장의 제안으로 이뤄졌다”고 소개하며, “서복공원은 한중간 고대사 교류를 알 수 있는 상징과도 같은 곳”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서귀포시는 2000년 전 불로장생의 꿈을 품은 진시황의 명령을 받은 서복이 3000명의 동남동녀와 함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도착 한 곳” 이라며 “불로초와 제주의 신화·역사를 스토리텔링으로 되살려 서귀포가 한중 교류의 출발지임을 널리 알려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세기 회장은 “오늘 기념식수를 하게 됨에 매우 기쁘다” 며 “식수는 한중 우정의 나무를 심고, 우리의 뜻을 알리는 것” 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회장은 “20년 전 서복전시관을 조성할 당시만해도 동북공정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감회가 새롭다” 며 “지금은 서복전시관과 서복공원이 한국과 중국의 교류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소로 자리잡았다”고 피력했다.

특히 “서복공원이 있기까지는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중국 정부의 도움이 컸다” 며 “당시 중국 산동성 성장은 2008년 4월 서복의 돌 조각상(높이 4.2m)을 중국에서 만들고 중국 배를 이용 제주로 수송케 했으며,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도 ‘서복공원’이라 적힌 친필 휘호를 보내왔고, 친황다오에서 보낸 ‘서복동도상(徐福東渡像)’도 서복공원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등 중국 산동성 도움으로 전시물을 채워 가면서 지금의 공원이 조성됐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그는 또한 “중국 관리들 중 서복공원을 다녀간 사람은 다들 출세했다” 며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비롯해 7인 상무위원 중 한사람인 류윈산(劉雲山) 위원, 대외연락부 부부장 때 서울 출장 왔다가 ‘서복공원’에 다녀왔다가 승진한 차이우(蔡武) 문화부장 등 중국 최고 관리들이 서복공원을 보고간 후 중국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러다보니 중국 관리들이 서복공원을 꼭 가보고 싶어 한다”고 말해 이날 참석자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 “하지만 최근 서복공원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는 것 같다” 며 “원 지사가 분발해 서복공원을 찾는 관광객이 많이 생길 수 있도록 해 줬으면 한다. 관광지도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농산물도 팔고 술도 팔고 해서 제주가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서복전시관 방문객 현황은 2010년 3만799명에서 2011년 8만2232명, 2012년 9만7122명으로 한때 치솟았다가 2013년 3만8434명으로 급감했다.

지난해도 3만5821명으로 전년보다 6.8% 줄어들었으며, 올해 4월 말 기준 1만1579명으로 하루 평균 입장객이 100명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서불과지(徐市過之)

전국을 천하통일한 진(秦)나라 시황제는 불로장생을 염원했다.

기원전 210년 중국 진(秦)시황제의 사자인 서불은 시황제의 명을 받아 영주산(한라산)에 있다는 불로초를 캐기 위해 배 60척과 동남동녀 3000명을 거느리고 찾아왔다가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으로 서불과지(徐市過之)라 새기고 떠났다.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는 또 이들 일행이 중국 친황다오((秦皇島)에서 동쪽을 향해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어 “서쪽을 향해 귀향한 포구”라는 뜻으로 지금의 ‘서귀포’ 지명이 여기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찾은 ‘불로초’는 무엇이었을까?

추사 김정희 고증에 따르면 제주에 도착한 서복은 상당기간 한라산 등지에 머물며 한라산 영지버섯, 당귀, 그리고 해발고도가 높은 지대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시로미 등 자생 약초를 구해 서귀포를 떠났다는 서복의 당시 행적에 대한 미세한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


서복공원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한중 수교 23주년’ 기념식수에 앞서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에게 이목이 집중됐다.

제15대 국회의원에 체육부. 통일부장관을 지낸 그는 서복 공원 탄생의 일등 공로자이다.

이 회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그동안 서복공원을 만들기까지 긴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서복공원은 1999년 2월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 서귀포시와 함께 한중친선협회가 한중 우호 관계를 다지는 차원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서복 전설 문화관광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사업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서복전시관은 지난 2003년 9월, 1만8750㎡ 부지에 561㎡의 건물로 개관, 사업비 93억원을 들여 만들어졌다.

이세기 회장은 “서복공원 만드는데 제주도 예산은 단 한푼도 안들어 갔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회 문공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우리 정부의 도움도 이끌어 냈지만 중국 정부의 도움이 더 컸다” 며 “중국 방문길에 당시 산동성 성장을 만나 서복공원 얘기를 나누다 ”서복의 고향이 산둥성 룽커우스(龍口)이다. 중국에서 협조를 해줬으면 어떻겠느냐“고 협조를 받아 관련 자료와 2008년에는 높이 4.2m 규모의 서복의 전신 석상 ‘서복기사비’를 중국에서 제작하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높이 4.2m 규모, 서복의 전신 석상 ‘서복기사비’


그는 이어 “하지만 이 거대한 석상을 만들어 놓으니 운반이 또 문제였다” 며 “우리나라 배가 실고 오자니 비용도 만만치 않았고 당시 제주도 재정상에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결국 산동성 성장을 찾아가 “한국 배로 실어오면 화물이고, 중국 배가 실어오면 조상을 모시는 거 아니냐”고 설득한 끝에 중국 배로 제주 서복공원에 옮겨와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서복의 고향 룽커우시에도 이와 똑같은 석상이 세워져 있다.

또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도 ‘서복공원’이라 적힌 친필 휘호를 보내왔으며, 산동성에서 태산에서 캐낸 바위(높이 2.5m, 무게 20t)가 공원 명칭을 조각해 직접 배에 실어 보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또 이것 저젓 전부 중국에서 보내온 것”이라며 한중 관계의 우호와 협력을 거듭 강조했다.

시진핑 중국 당총서기이자 국가주석과의 서복공원에 얽힌 인연도 소개했다.

이 회장은 “2005년 시진핑이 절강성 서기였던 시절, 마침 그가 제주를 찾기로 돼 있었다” 며 “제주도에 가면 서복공원을 꼭 가보라고 권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시진핑 국가주석은 “서복공원이 왜 제주도에 있느냐”고 반문했지만 서복전시관을 보고 그렇게 좋아했다고 이 회장은 밝혔다.

지난해 7월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한중우호를 상징하는 인물로 처음 든 것은 서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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